에두아르 에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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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 에리오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급진당 대표를 역임하며 여러 정부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1904년 리옹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리옹 시장을 지냈으며, 1924년, 1926년, 1932년 세 차례 총리를 역임했다. 또한,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과 프랑스 대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외교적으로는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홀로도모르를 부정하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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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올랑드는 1954년 루앙에서 태어나 사회당 제1서기를 거쳐 2012년부터 2017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퇴임 후 저술 활동을 하다가 2024년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2. 생애
에두아르 에리오는 1872년 7월 5일 프랑스 트루아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2]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대독 협조 정책을 취하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에두아르 에리오는 급진사회당에 참여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 중심으로 펼쳐 1904년 리옹 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며 당의 지도자로 성장,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1]
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독일 점령 하에서는 침묵을 강요받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비시 정권으로부터 후임 총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제4공화국 하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리옹 시장으로 재직 당시, 에리오는 지방 정부와 지역 노조 간의 관계 개선, 공공 부조 기금 증액, 도시 재생 프로그램 시작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2] 그는 1957년 3월 26일 리옹에서 사망했다.[3] 피에르-마리 제를리에 추기경과 함께 임종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로와스 묘지에 "교회 의식"으로 매장되었다.[4]
3. 정치 경력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의 루르 문제 수습에 참여하는 등 독일과의 협조 정책을 추진했고,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1]
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으며,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하원 의장을 맡았다.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으나, 연합군 상륙 후 비시 정권의 총리 제안을 거부했다. 제4공화국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1]
3. 1. 정부 직책
3. 2. 선출직
- '''프랑스 하원'''
-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 1947년–1954년
- 론 선출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1946년–1957년 (1957년 사망). 1946년 선출, 1951년, 1956년 재선.
- '''헌법 제정 의회'''
- 론 선출 헌법 제정 의회 의원: 1945년–1946년. 1945년 선출, 1946년 6월 재선.
- '''프랑스 하원'''
- 프랑스 대의원 의회 의장: 1925년–1926년 / 1936년–1940년
- 론 선출 프랑스 대의원 의회 의원: 1919년–1942년 (1942년 필리프 페탱에 의한 의회 해산). 1919년 선출, 1924년, 1928년, 1932년, 1936년 재선.
- '''프랑스 원로원'''
- 론 상원의원: 1912년–1919년. 1911년 선출.
- '''론 종합위원회'''
- 론 종합위원회 위원: 1945년–1951년
- '''시의회'''
- 리옹 시장: 1905년–1940년 (1940년 비시 정권에 의해 축출) / 1945년–1957년 (1957년 사망). 1908년, 1912년, 1919년, 1925년, 1929년, 1935년, 1945년, 1947년, 1953년 재선.
- 리옹 시의원: 1904년–1940년 (1940년 비시 정권에 의해 축출) / 1945년–1957년 (1957년 사망). 1908년, 1912년, 1919년, 1925년, 1929년, 1935년, 1945년, 1947년, 1953년 재선.
- 1939년 대통령 선거: 급진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5.86%(53표) 득표에 그쳐 4위로 낙선.
3. 3. 정당 활동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대독 협조 정책을 취하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1]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독일 점령 하에서는 침묵을 강요받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비시 정권으로부터 후임 총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제4공화국 하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1]
급진당 대표직은 1919년–1926년, 1931년–1936년, 1948년–1953년, 1955년–1957년 동안 역임했다.[1]
3. 4. 외교 정책
에두아르 에리오는 급진사회당 소속으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독일과의 협조 정책을 취했다.[5]1933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에리오는 기근에 대한 증언을 부인하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만개한 정원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없으며, 자신은 기아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주장은 소련의 적대자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라우다는 에리오가 "소련의 기근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언론의 거짓말을 단호히 반박했다"고 보도했다.[6]
3. 5. 국내 정책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25년 4월 3일, 아나톨 드 몽지가 클레망텔의 뒤를 이어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후 에두아르 에리오는 다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사회당·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홀로도모르 부정의 절정은 1933년 8월 26일부터 9월 9일까지 에리오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나타났다. 에리오는 기근에 대한 증언을 부인하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만개한 정원과 같다"고 말했다.[5] 그는 언론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없으며, 자신은 기아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주장은 소련의 적대자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기근으로 황폐해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1933년 9월 13일자 ''프라우다(Pravda)''는 에리오가 "소련의 기근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언론의 거짓말을 단호히 반박했다"고 보도했다.[6]
4. 역대 선거 결과
5. 저서
ヨーロッパ合衆国프랑스어 (유럽합중국), 가시마 모리노스케(鹿島守之助) 역, 1962년, 가시마 연구소(鹿島研究所) 발행, 381쪽.
6. 기타
에두아르 에리오는 1933년 베리키 베체렉(오늘날의 즈렌야닌) 시의 명예 시민으로 선포되었다. 즈렌야닌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그가 키이우의 한 교회를 방문했던 일화는 당시를 위해 조작된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던 내용으로, 다닐로 키시(Danilo Kiš)의 소설 보리스 다비도비치를 위한 무덤에 수록된 "기계 사자들"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Édouard HERRIOT
https://www.academie[...]
[2]
서적
The Search for Social Peace: Reform Legislation in France, 1890–1914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8-04-08
[3]
뉴스
Herriot Is Dead. French Leader, 84
https://query.nytime[...]
2015-01-07
[4]
간행물
At the Bedside
https://content.time[...]
Time Magazine
2022-12-31
[5]
서적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6]
웹사이트
France, Germany and Austria facing the famine of 1932–1933 in Ukraine
https://web.archive.[...]
201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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